5살까지도 나는 아이에게 한글 공부를 시키지 않았다. 대신 경험을 할 기회를 주려고 노력했다. 숲 놀이를 다녀오면 주워 온 나뭇잎으로 미술 놀이도 하고, 도토리로 팽이도 만들어 보고, 숲에서 보았던 곤충은 책을 보여주며 함께 알아갔다.
5살 딸은 집에 있는 책 중에서 유독 '호비'책을 좋아했다. 호비는 15개월부터 신청했고 매달 놀잇감과 함께 책이 배송되는 시스템이었다. '호비'책을 좋아해서 자주 읽어 주었는데 7살인 지금도 예전에 읽었던 '호비'책을 종종 가져온다. 새로운 책도 좋지만 여러 번 읽는 것도 괜찮다고 해서 정성껏 읽어준다.
책을 여러 번 읽어서인지 혼자서 '호비'책을 읽으려는 시도가 이어졌고, 심지어 외워서 책을 읽기도 했다.
나는 지금까지도 전자책 보단 종이책을 선호한다. 이런 기호 때문인지 패드로 한글 공부를 시키는 엄마들이 보여도 동요하지 않았다. 시대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느낌도 있었지만 정말 중요한 부분이 아니라면 자신의 신념에 따라 결정하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아이의 발달 단계에 따라 수행해야 할 과제를 부여받게 되는 것 같다. 이런 과제를 수행하면서 엄마는 자기 자신을 더 들여다보게 되고 비로소 진정한 나와 마주하며 반성과 배움의 연속선상에 서게 되는 것 같다.
육아는 매 순간 엄마의 판단과 결정을 요구한다. 그러다 보니 매번 나의 미숙함을 발견한다. 하지만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아이와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내 아이에 대한 데이터 또한 쌓여가기 때문이다. 이렇게 쌓인 내 아이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육아 기준을 세운다면 큰 어려움 없이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6살이 되었다. 난 지금이 한글 공부 적기라고 생각했다. 아이가 이때부터 "엄마! 이건 무슨 글씨야?", "저건 뭐라고 쓰여 있는 거야?"라는 질문을 하기 시작했고 자꾸 뭔가를 끄적이고 싶어 했다. 기본적으로 모음과 자음은 알아야 해서 집에서 엄마랑 함께 할 수 있는 '한글 떼기' 학습지를 주문했다.
주문 후 딸과 함께 문구점에 가서 세로엔 자음이 가로엔 모음이 쓰여 있는 대형 브로마이드도 샀다. 학습지를 풀 때 모음과 자음을 외워야 한다는 부담감을 주고 싶지 않아서 언제든 찾아볼 수 있도록 붙여 놓고 싶었다. 실제로, 글자를 배울 때 브로마이드에 있는 자음과 모음을 가리켜 둘이 만나는 지점에 지금 배우는 글자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어느 정도 모음과 자음에 익숙할 때쯤엔 엄마가 '가'라고 소리를 내면 소리만 듣고 해당한 글자를 브로마이드에서 찾게 했고, '가'로 시작한 단어를 누가 더 많이 말하는지 시합하기도 했다. 물론 엄마는 기억이 나지 않는 척 저주는 센스를 발휘해야 아이가 신이 날 것이다. 글자에 더 친해지면 끝말잇기를 했다. 엄마가 "고양이"라고 하면 아이는" 이빨"이라고 이어서 말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엄마와 함께 놀이하는 느낌으로 한글을 배워갔다.
6살 되는 가을부터는 일기를 쓰게 했다. 아이의 경험을 접목해서 한글을 배우게 하고 싶었다. 쉬운 단어도 겨우 한두 개 쓰는 정도의 수준이었지만 괜찮았다. 아이의 생각을 글로 옮기는 과정은 엄마가 해주고, 아이는 따라 쓰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아이가 따라 쓰다 지치지 않도록 처음엔 2줄 정도로 시작했다. 익숙해지면 한 줄씩 늘렸다. 아이가 "난 오늘 친구들이랑 병원 놀이를 했는데 재밌었어"라고 말하면 엄마는 일기장에 '나는 오늘 어린이집 친구들과 병원 놀이를 했다. 재밌었다.'라고 써주는 것이다. 아이는 자신이 말한 내용이라 그런지 친근하게 받아들였다. 아이가 아래 줄에 따라서 쓰고 나면 스스로 읽게 했다. 자기 말을 옮겨 놓아서 그런지 자신 있게 읽었다. 이렇게 일기를 쓰다 보니 한글이 금방 늘었다.
아는 글자가 많아지고 읽을 줄 알게 되니 자신감이 붙는 모양이다. 어느 날은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겠다고 한다. 물론 두 줄이었으나 따라 쓰거나 보지 않고 혼자의 힘으로 문장을 완성 시키는 딸이 대견하게 보였다.
일기를 쓰고 난 이후 식당 놀이를 할 때도 "엄마! 나 식당 메뉴판 만들 거야. 먹고 싶은 음식 말해봐"라고 물으며 종이에 직접 글씨를 쓰며 메뉴판을 만든다. 한글을 알면 다른 사람 도움 없이도 자신이 원하는 걸 만들 수 있다는 걸 느낀 것 같다.
5세 때만 해도 "어머니, 00이가 한글을 쓰고 읽는 게 반 여아 중에서 가장 늦어요"라는 어린이집 상담 전화를 받았었다. 말은 반에서 제일 잘하는 데, 쓰고 읽는 게 늦다는 것이다. 한글 공부를 일찍 시작하는 아이들이 많다 보니 발달 단계에 맞게 커가고 있는 내 아이는 뒤처진 아이가 되어 있었다. 전화 상담을 마치고 고민이 많아졌다. 또래에 비해 뒤처졌을 때 친구들이 "넌 이것도 모르냐?"라는 말에 내 아이가 받을 상처를 생각하니 굳은 신념까지 흔들렸다.
카페에서 좋아하는 커피를 홀짝홀짝 마시며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한글은 모국어인 만큼 자주 사용하고 자주 접하므로 누구나 어느 정도 자라면 다 쓰고 말하게 돼 있다. 속도 차이만 있을 뿐이다. 한글을 간단하게 읽고 쓸 줄 아는 건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지금부터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2년이라는 시간이 있으니 조급하지 않아도 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6살부터 진행했던 '한글 공부'와 '일기 쓰기'는 생각보다 효과가 빨리 나타났다. 6살 겨울엔 반 아이 중 책을 가장 잘 읽고 쓰는 아이로 성장해 있었다. 간단한 글자들이지만 막힘없이 읽어가는 딸의 모습이 기특했다. 물론 어린이집 선생님들의 노고도 무시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 아이가 큰 스트레스 없이 한글을 받아들이고 깨우쳐 줘서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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